도자기 이론

김해 분청사기

푸른집이야기 2019. 9. 15. 12:15

1. 분청사기 개념과 특징

분청사기란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로, 고유섭(高裕燮)선생이 일본인이 부르던 의미 모호한 미시마(三島)라는 명칭에 반해 백토분장과 회청색의 특징을 근거로 분장회청사기로 명명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대체로 고려왕조 14세기 중엽경, 퇴조해 가던 상감청자에서 시작하여 15세기초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크게 발전하여 고려청자와는 미의 방향을 전혀 달리하는 활달한 아름다움을 한껏 발휘한다. 세종대왕 때 다양한 기법의 분청사기가 제작되어 한국도자사상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이 되면 경기도 광주(廣州)에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관요(官窯), 즉 분원(分院)이 설치되어 국가에 공납(貢納)하던 각지의 분청사기 가마는 서서히 쇠퇴하여 갔다. 그리하여 15세기 후반16 세기 전반에 백토분장기법과 귀얄분장기법이 성행하여 분청사기 가마는 소규모로 운영되면서 점차로 백자로 이행해 갔다.

 

2. 분청사기의 변천

발생기 전반부는 고려 상감청자가 쇠퇴하는 반면 분청사기가 태동하는 시기로 태토가 조잡하고 기벽이 두껍고 암록색을 띤다. 청자의 무늬는 구름무늬가 빗방울무늬로 변형된다든지, 대접의 유로수금무늬나 연당초무늬 같은 것은 점점 생략되어 몇 줄의 선만을 둘러 대체로 민무늬의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청자는 정형은 잃었지만 그대로 분청사기로 이어지며, 전남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미산과 당전 부락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14세기 말 청자 가마터가 이에 속한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들로는 <청자상감연당초무늬정릉명대접>, <청자상감연버들무늬덕천명병>, <분청사기상감의성고명 병> 등이 있다.

조선 왕조의 기반이 다져지는 1392년 이후 에는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는 시기로 퇴화된 상감청자의 무늬가 그대로 이어지는 한편 기형(器形), 무늬, 유태(釉胎)가 재정비되어 조선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한편 고려 상감 기법에서 간혹 쓰이던 인화 기법이 대접의 중심 무늬로 등장하기 시작함으로써 분청사기 인화 기법이 발생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속하는 그릇의 무늬는 퇴화된 연당초무늬, 풀무늬, 중권무늬, 빗방울무늬, 성긴 인화무늬가 많으며 부수적인 무늬로는 여의두무늬, 연판무늬, 방사성 파상무늬 등이 사용된다.

 

 

 

 

 

 

 

 

 

 

 

 

 

3. 문헌속의 분청사기

14세기 말 고려말 정세가 불안 강진 중심의 청자 제작이 쇠퇴 하고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장인들이 전국으로 흩어짐

 

 

분청사기인화국화무늬공안부명대접
1400년부터 1420년 사이, 높이 7.8센티미터부터 9.4센티미터, 입지름 16센티미터부터 17.7센티미터, 굽지름 5.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형은 대접의 경우 안으로 휜 투박한 모양이 주종을 이루며 대마디 굽의 특징을 보인다. 제작 방법은 태토 빚음 받침에 포개어 제작했으며, 유약은 청자유 계통의 투명유지만 태토가 짙은 회흑색을 띠고 색상은 여전히 암록색이 많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에는 <청자상감연당초무늬정릉명대접>에 근원을 둔 <분청사기상감연당초무늬 공안명대접>, 인화 기법의 발생을 보여 주는 <분청사기인화국화무늬공안부명 대접>, <분청사기인화국화무늬인녕부명대접편>, 정소공주묘에서 출토된 <청자상감초화무늬네귀항아리><분청사기인화집단연권문네귀항아리> 등이 있다. 이 시기에 해당되는 가마터로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쌍동리, 광주광역시 충효동, 전남 곡성군 오곡면 구성리, 경남 사천시 구암리, 산청군 신등면 장천리, 경북 상주시 화동면 어산리 등이 있다.

 

여러 지방으로 퍼져 나간 장인들은 소규모의 가마를 짓고 분청사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정형을 잃어 가던 상감 청자가 서서히 탈바꿈하여 어떤 조건에도 구애됨이 없이 전국 도처에서 개인들에 의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도자기 제작지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간 현상의 또 다른 이유로는 고려 말 금속기의 사용을 금지하고, 대신 자기와 목기(木器)를 전용하도록 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고려사공양왕 1(1391)의 기록에 의하면,

유기(鍮器), 동기(銅器)는 이 땅에서는 나지 않는 물건이니 원컨대 지금부터 동기와 철기를 금하고 자기, 목기만을 사용케 하여 습속을 개혁하십시오

라는 중랑장 방사량의 상소가 있다. 실제로 상소 내용대로 시행되었다면 이것은 보편화된 도자기의 실용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처럼 강진으로부터 전국으로 퍼져 나간 현상은 도자기의 실용화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확실히 뒷받침해 주는 것이 1424년에서 1432년 사이에 조사하여 기록한 세종실록 지리지의 토산조(土産條) 이다. 자기소· 도기소 가마들의 전국 확산현상은 조선시대의 짧은 몇 년 동안 갑자기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14세기 중엽부터 확산되어 세종조에는 324개소의 자기와 도기 가마가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강경숙, 분청사기 연구, 일지사, 1986, 16~18)

세종실록 지리지요업 내용을 보면, 가마 위치는 8도의 주(), (), (), ()의 관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표기하고 그 품질에 따라 상품, 중품, 하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자기소와 도기소 324개소 가운데 상품은 모두 네 곳(경기도 광주의 벌을천, 경상도 고령의 예현리, 상주의 추현리와 이미외리)뿐이다. 대체로 이 네 곳에서는 백자를 생산하였으나 1424년부터 1432년 사이에 백자의 생산량은 아주 적어 임금의 어기(御器)라든지 이에 버금가는 용도에만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자기소의 중품과 하품은 대부분이 분청사기를 가리킨 것으로 생각된다. 도기소는 도기나 옹기(甕器)를 제작한 곳으로서 지명에는 ()”이나 ()”자가 많은 것에 비해 자기소에는 이나 자가 들어간 지명이 거의 없다.

이러한 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성현(成俔)용재총화 齋叢話10
사람이 사용하는 것은 질그릇이 가장 긴요하다. 지금의 마포와 노량진 등은 모두 진흙 굽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이는 모두 와기, 항아리, 독의 종류이고 자기와 같은 것은 백토를 써서 정밀하게 구워 만들어야 사용하기 좋다. 외방 각 도에는 만드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고령에서 만드는 것이 가장 정교하다. 그러나 광주의 것이 더욱 정묘하다라는 내용이다.

성현은 세종 21(1439)에서 연산군 10(1504)까지 생존했던 사람이다. 용재총화의 내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의 성종대까지의 왕세가, 장상, 시인, 문호, 서화, 음악인, 과부, 승방, 복서, 기녀, 탕녀 등에 대한 일화(逸話), 해담(咳痰), 연화(戀話)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질그릇, 와기, 항아리, 독 그리고 자기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로 그 당시의 분류 기준이었으리라고 본다.

따라서 분청사기는 세종 당시 특정한 용어가 없었다고 해도 백자와 함께 자기로 분류되었다. 그러므로 130여 개소나 되는 자기소에서 분청사기가 제조되어 관청은 물론이고 서민에까지 쓰였기 때문에 한국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민족 자기로 보아도 무관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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