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이론

도자기의 역사

푸른집이야기 2019. 9. 15. 12:13

도자기의 변천 과정

1. 토기→ 도기(陶器) →자기(磁器)

1) 토기
․ 토기를 질로 만들어 불에 굽지 않고 햇볕에 말려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 그릇을 만들어 600℃ 정도의 낮은 화도에서 구워냈으며 가마도 없었다.

2) 도기
․ 도기는 900∼1,000℃ 내외의 화도에서 산화번조(酸化燔造:가마에 불을 땔 때 산소를 많이 들여보내는 방법.
․ 황색·갈색·적색을 띠며, 표면에 유약(釉藥)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3) 자기
․ 점력을 갖춘 순도 높은 백토(白土:高嶺土), 즉 질(胎土:陶土·陶石)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장석질(長石質)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번조(燔造)

2. 시대별 발전 모습
1) 신석기 시대
․  식량을 저축
․  채집해 온 과일이나 강가, 바닷가에서 채집한 조개 등을 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덧무늬 도기(융기문 토기) - 보물 제597호









(다) 빗살무늬 도기


경남 거창 임불리 출토

2) 청동기 시대
․ 제사를 지내기 위해 술과 제물을 담을 그릇이 필요(단지 또는 호(壺)


함북 옹기 송평동에서 출토된 구멍무늬 도기(민무늬 도기의 일종)


충남 부여 송국리에서 출토된 일명 송국리형 도기


가지무늬 도기 - 국립중앙박물관
3) 초기철기 시대
․  이 시기에는 철이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철은 단단한 성질로 인해 무기와 농기구에 사용되었고 청동기는 군장이나 제사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물로 사용되었다.
 ․ 목이 긴 흑도와 함께 굽이 높은 고배(高杯)가 출현하였다.


전북 완주 갈동에서 출토된 검은간 도기(흑도 장경호, 黑陶長頸壺 - 흑도로 된 목이 기다란 호)
․ 아가리 부분에 덧띠를 붙여서 돌대(突帶)처럼 테를 두르는 새로운 기법의 그릇이 등장한다. 아가리의 테는 이 시기에 공통된 양식처럼 등장한다.


경북 상주 병성동에서 출토된 덧띠 도기(점토대 도기, 粘土帶陶器)

4) 백제
․ 호들이 많이 출토되며 흑도라고 불리는 도기들도 나온다.

충남 부여 군수리에서 출토된 일명 호자(虎子)로 용도는 남성용 요강이다.
5) 가야
․ 남해안을 무대로 교역을 한 까닭에 훨씬 개방된 문화적 성격을 드러냄
․ 가야의 도기들에는 말, 배, 집, 오리, 짚신, 바퀴 모양 등 재미있는 형태의 도기들이 많아 흥미롭다.


기마인물형 도기 - 국보 제275호(가야의 말갖춤(마구)와 무기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


차륜식(車輪飾, 수레바퀴가 장식된) 도기 - 보물 제637호
6) 신라(통일 이전)
․  신라의 고분에서 나온 도기 말은 손으로 우직하게 빚어낸 것 같은 느낌으로 가야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말과 함께 신라에서만 발견되는 도우(陶偶)들이 있다.

토우장식장경호(계림호 30호분 출토) - 국보 제195호

도제기마인물상 - 국보 제91호
7) 통일신라
․  통일신라 도기들은 매우 실용적인 형태로 오늘날 쓰는 접시, 대접, 사발, 항아리, 병과 거의 닮은 것이 많아진다.
․ 높은 굽에서 낮은 굽의 그릇들로 바뀌어 간다.
․  통일신라 도기의 또 다른 특징은 도기의 표면에 유약을 입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가장 많이 만들어진 것은 녹유(綠釉)라고 하는 유약을 입힌 그릇이다.
․ 녹유에는 산화연이라는 납 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데 유약을 그릇 표면에 바르고 700~800도에서 굽게 되면 도기는 고색을 띤다.
․ 인화문 도기의 성행

녹유 골호(불교에서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매장하는데 사용된 뼈 항아리) - 국보 제125호

8) 고려
․ 고려시대 도기는 공통적으로 엷은 회청색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색감에서는 고요함, 적막감을 뿜어내는 것 같다.
․ 고려 청자의 시작




 ․  더 좋은 흙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결과 강진, 고창 등이 선택되었고 우수한 청자는 강진, 고창에서부터 만들어졌다.


․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
 12세기 전반인 1123년경 고려 청자의 양상을 잘 보여 주는 자료로 <<선화봉사고려도경>>이 있다.
 첫째, 외국 사절들의 식사 또는 만찬 석상에 나오는 그릇들은 주로 금이나 은으로 도금한 금속기였고 청자는 귀하고 값진 것이었다.
 둘째, 1123년 당시 고려인들은 청자의 색을 비색이라 하였고
 셋째, 근년 이래로 제작이 공교해지고 유(釉)의 색깔이 아름다워졌다.
 넷째, 기형에 있어 완, 접시, 술잔, 꽃병, 국그릇 등은 중국에서 사용되는 일정한 기물의 형태를 닮았으나 술항아리와 산예향로는 다른 그릇과 달리 특히 뛰어나며 절묘하다.
 다섯째, 술항아리는 참외 모양의 몸체에 뚜껑이 있으며
 여섯째, 당시 청자의 유색이 월주 청자의 유색과 비슷하고 그 당시 새로 설치된 여주에서 만든 청자와 비슷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12세기 고려 청자를 비색 청자라고 부르는 것은 위의 기록에서 따온 것이며, 고려 청자가 1123년에 가까운 1110년대에 와서 유색과 형태가 아름다워졌음을 알 수 있다.
․ 상형청자(象形靑瓷)
․  고려 청자가 갖는 가장 강력한 특징의 하나로 길이 자랑되고 있다.

국보 제65호  청자기린유개향로(靑磁麒麟鈕蓋香爐 )
- 청자로서 기린이 뚜껑의 모습으로 덮어진 향로-


 
국보 제61호 청자비룡형주자(靑磁飛龍形注子)
- 청자로서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동물 형태의 주전자 -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鈕蓋香爐) - 국보 제60호


청자압형수적(靑磁鴨形水滴 - 청자로서 오리 모양을 한 연적) - 국보 제74호


청자도형연적(靑磁桃形硯滴 - 청자로서 복숭아 모양을 한 연적) - 보물 제1025호

청자소문과형병(靑磁素文瓜形甁 - 청자로서 참외 모양을 한 꽃병) - 국보 제94호

청자투각칠보문향로,

․ 상감청자
 상감이란 금속기, 도자기 등의 겉면에다 여러 가지 무늬를 파고 그 속에 다른 재료를 넣는 기술을 말한다. 이 상감 기법은 고려, 조선시대의 공예품에 널리 사용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독특한 기법이다.
․  청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 중요한 원인은 옥(玉)과 관계되어 있다.․ 중국에서 옥은 군자(君子)를 상징하고 부귀와 죽은 후의 내세를 보장해주는 신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의 사람들이 흙으로 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서 도공들의 수많은 실험 끝에 3C 말에 청자가 만들어졌다.․ 고려자기는 이러한 중국의 새로운 자기제작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자기의 출현은 이렇게 중국자기의 영향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고려는 곧 중국자기를 능가하는 독창적인 청자를 만들어 낼 수 있게됩니다.․ 고려청자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때는 대략 10C경으로 초기청자는 그 표면이 고르지 못하고 녹갈색이 많이 나타난다.․ 11C~12C 전성기 때에는 세계최고의 청자 예술품이 나온다.․ 비색청자 혹은 순청자라고 불리는 청자는 고요한 연못을 들여다보는 듯한 색의 신비로운 분위기로 중국의 남송때 태평노인이 천하의 제일의 것들을 언급하는데 '고려비색(高麗秘色)이라 하여 이 시대의 청자를 가리키기도 했다.․ 12C~13C 에 걸쳐 상감청자가 나타한다. 삼강기법이란 그릇표면에 나타내고자하는 무늬를 음각으로 새긴 후 그 안을 백토나 자토로 메우고 구워낸 기법을 말한다.․ 이는 우리 나라가 최초로 도자기에 응용한 방법으로써 매우 독창적이다․ 또한 삼강청자는 구름이나 학등의 무늬가 많이 나타나는데 당시 불교를 믿고 불교적 선을 이루려는 고려인들의 마음의 세계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
․원나라에서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아 고급관리에게 보내는 귀한 선물
․귀족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최고급의 청자를 만들려고 함


청자상감 모란당초문 `正陵`명 대접(1365)

詩酒圖, 낙파 이경윤, 16세기 후반, 호림미술관

고사탁족도, 이경윤, 16세기말


국보 제66호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靑磁象嵌柳竹蓮蘆鴛鴦文淨甁)
 - 상감청자로서 버드나무와 갈대, 연꽃, 원앙새를 새긴 정병 -


청자상감국모란문‘신축’명벼루(靑磁象嵌菊牡丹文‘辛丑’銘硯) - 보물 제1382호


국보 제116호 청자상감모란문표형병(靑磁象嵌牡丹文瓢形甁 )
- 상감청자로서 모란이 새겨진 표주박 형태의 병 -


청자상감모란문항(靑磁象嵌牡丹文缸 - 상감청자로서 모란이 새겨진 항아리) - 국보 제9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 국보 제68호

․  청자의 쇠퇴
14세기 후반에 일어난 왜구들의 침입으로 인한 조운의 폐쇄와 동기나 유기 대신 실생활에 쓰이는 실용적인 도자기를 대량 생산하라는 신흥 사대부의 요구 등으로 인해, 고려 상감청자 제작의 중심지인 강진과 부안의 가마 대신 전국 내륙 지방에 수많은 가마가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13C~14C에 걸쳐 청자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 전문화된 공납품을 생산하던 소(所)의 해체가 가속화되어 전문적 분업화로 제작되던 도자 생산은 점차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  중앙통제에 의해 제작되던 청자 생산은 통제의 해이와 함께 수요층의 증가로 생산과 공급이 확대되면서 점차 그 질이 쇠퇴하고 분청자로 이행된다. ․ 땔감고갈·장인이탈이 쇠퇴 이유․ 14세기는 고려 왕조의 쇠퇴와 함께 청자도 급속하게 퇴락하고 있다.
․ 부안 청자의 쇠퇴는 장인들의 이탈도 원인일 수 있으나 땔감 부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추정된다.9) 조선 분청자 (분청사기)
․ 고려 왕실의 몰락
․ 분청자의 아름다움 - 거칠지만 원숙함
․ 보통 분청자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청자와 같은 것인데 백토로 분장한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사람으로 비유해서 말하자면 청자 가운데 순청자가 10대이고 상감청자가 2, 30대라면 분청자는 4, 50대의 중년층이라고 할 수 있다.
․ 분청자에는 청자로서 아주 원숙한 면이 있는 반면, 형태나 색깔 등 여러 면에서 청자와 비교되지 않는 좀 거친 면이 나타나 있다.







분청사기철화당초문장군(粉靑沙器鐵畵唐草文장군) - 보물 제1062호
 장군은 물·술·간장·오줌 따위를 담는 그릇의 하나로, 크기가 작은 것은 물이나 술 따위를 넣고 큰 것은 오줌을 담는 용기로 사용하였다.

분청사기 박지 모란문병, 15세기, 개인소장



분청사기박지모란문철채자라병(粉靑沙器剝地牡丹文鐵彩자라甁) - 국보 제260호


분청사기철화어문병

분청사기귀얄문호

10) 조선 백자
․  보통 조선 도자기라고 하면 백자라고 할 정도로 백자는 조선 도자기를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백토가 청자의 제적에 사용되는 흙보다 순도가 높으며 안정되어 있다. ․ 굽는 온도도 청자의 경우 1280도 가량이지만 백자의 경우는 1300도 정도가 일반적이다.
․ 따라서 도자기의 발달 과정에서 청자가 더욱 발전한 것이 백자라는 점이다.
․ 특히 양반층이 추구하는 세계는 유학이라고 하는 성리학의 세계였다. 이 성리학이란 무엇보다도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생활의 가르침으로 추구하며 동시에 지상의 삶에서 모든 것을 구한다.
․ 조선시대에 백자가 유행한 것은 지배층인 양반들이 백색의 세계를 선호한 것과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조선 왕실에서는 청화백자를 매우 선호하였다. 말끔한 백자 위에 사대부의 기개를 나타내는 사군자라든지 용이 그려져 있는 그릇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백자주자(白磁注子) - 국보 제281호

백자청화운룡문병(白磁靑華雲龍文甁) - 보물 제785호

백자청화<홍치명>송죽문호(白磁靑華<弘治銘>松竹文壺) - 국보 제176호

백자진사매국문병(白磁辰砂梅菊文甁) - 국보 제168호
(나) 17세기 - 조선적인 세계의 재발견
 17세기 전반은 광해군과 인조에 의해 다스려지던 시기로 임진왜란의 막대한 피해를 채 복구하기도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반영하듯 백자 제작도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청화 안료(코발트)를 구하지 못해 청화백자의 제작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므로 현재 남아 있는 예가 없다. 대용으로 철화 안료를 사용하여 제작한 철화백자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시기 백자의 특색은 담청회백색, 회백색의 백자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철화의 운룡문, 초문, 매죽문이 그려진 항아리, 병, 지석, 명기류, 접시류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백자 태토로 빚은 청자가 계속 제작되어 중기 백자의 특색인 회백자(灰白瓷)에 철화문양 중심으로 바뀌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굵은 모래받침에 받쳐 구운 막사기의 사발이나 접시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백자철화운룡문호(白磁鐵繪雲龍文壺) - 보물 제645호

백자태항(白磁胎缸) 내, 외 - 보물 제1169호


백자철화포도문호, 18세기 전반, 중박, 국보93호

백자대호(白磁大壺 - 일명 달항아리) - 국보 제310호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 국보 제107호

․  19세기 - 더욱 정취 깊은 한국적인 세계
․ 백자는 18세기의 뒤를 이어 분원리 가마에서 더욱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음각, 양각, 투각, 상형의 순백자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 조선 백자 전통의 단절
 1876년 이후 일본의 규슈 지방에서 서구의 영향을 받아 산업화된 자기들이 공장에서 다량 생산된다.
․ 이렇게 만들어진 일본의 왜사기(倭沙器)는 조선 백자 대신 조선 사회에 침투하기 시작하여 점차 조선 백자는 값싼 왜사기와의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 미국에서 구호물품으로 스테인리스가 들어왔고, 곧이어 양은 냄비가 범람했으며 플라스틱 그릇들이 우리 도자기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청화백자(靑華白磁)'수(壽)'자문각병(字文角甁) , 국립진주박물관




긍재 김득신, 1754-1822(파적도), 18세기말-19세기초, 지본담채, 간송



임진왜란의 또 다른 이름 - 도자기 전쟁

․ 일본에는 생선을 주로 먹는데 목기그릇을 썼다.
․ 우리나라 도자기를 보고 사가다가 도공들을 잡아감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포로로 많은 학자와 기술자 그리고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을 끌고 갔다.

․특히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의 원조로 추앙받는 우리나라 출신의 도공인 이삼평은 일본의 도자기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를 했다.

․이삼평은 아리타의 이즈미야마에서 도자기 원료를 발견하여 백자를 만들어 내면서 일본 도자기의 효시가 되었다.

․ 임진왜란 당시에 납치된 도공의 숫자가 약 420명 정도라는데요. 1600년대부터 1700년까지 백 여년간 일본이 해외(유럽)에 수출한 도자기의 숫자가 7천만점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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