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작품
[스크랩] 저 잔으로 못 마셔보고 이상을 논하지 말라
푸른집이야기
2014. 5. 19. 10:05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는 별로 크지 않은 오리 모양 청자 연적이 하나 있다. 오리 한 마리가 연못을 헤엄쳐 다니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연줄기 하나를 입에 물었다. 연줄기에 딸려 오던 연꽃 한 송이가 오리 등에 난짝 올라앉았다. 오리는 등이 가려웠나 보다. "내 등에 무엇이 있는감?"하고는 목을 움츠리고 눈동자를 뒤로 돌려 돌아보려고 애쓴다. 몸은 잔뜩 움츠려서 아예 동그래졌다. 이 모양이 청자의 푸르파르스름한 색과 어울려 매우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놈 오리의 장난기가 온 몸에 덕지덕지 묻었다.
중국 사람들은 옥을 귀하고 신성하게 여겼다. 옥을 만들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 수 있었다. 자기는 인공적으로 옥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 끝에 탄생했다. 우리는 중국의 자기를 본뜨고 그 기술을 배워 고려 청자를 만들었고, 조선 백자를 생산했다. 청자는 자기 중에서 푸르스름한 신비한 색을 띤 자기를 말한다. 청자를 만드는 흙은 따로 있다. 청자토로 모양을 만들고 900도 정도로 굽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 1200도에서 1300도 가까운 온도로 구우면 청자가 된다고 한다. 1300도에 가까운 온도는 잘 만든 가마에 3일 정도로 좋은 장작을 때야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 가마의 입구를 막아 산소 유입량을 줄이면 1200도 이상의 열기는 산화제2철의 산소를 빼앗아 불타려고 하고, 그러면 산화제2철은 산소를 빼앗겨 산화제1철(FeO)이 된다. 이 산화제1철이 약 3~5% 정도 잔존할 때의 색깔이 바로 청자의 색이라고 한다. 우리의 청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밑에 순화 4년(993년)에 만들었다는 글자가 새겨진 동이 같은 꽃병이다. 이후에 고려 청자는 더욱 발전을 거듭하여 중국 사람들도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청자가 되었다. 청자의 고고한 듯 은은한 귀티 나는 색은 고려의 지배층 귀족들의 취향과 어울려 맞아 떨어졌다. 청자는 고려의 귀족적 성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났던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가장 발전하였다. 청자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기는 매우 어렵다. 칼로 새겨 넣는 상감법이 등장하기 이전의 청자를 순(수)청자라고 한다. 무늬넣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색깔과 모양으로 최고의 경지를 개척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그야말로 모양과 색깔로 승부했다. 참외모양 청자 꽃병은 이런 시기의 대표작이다. 참외의 독특한 곡선미를 살려 몸통으로 삼았다. 그리고 아래에 주름잡힌 받침대를 만들어 끼우고, 위에는 꽃 모양의 높은 주둥이를 만들어 붙였다. 색과 모양이 어울려 적막하고 고귀한 이상의 세상을 보는 이에게 전달하고 있다. 저 꽃병에 무슨 꽃을 꽂을 수 있으랴. 병 자체가 그냥 이상이고 고귀의 화신이 되어 버린 듯하다. 대나무 모양의 술병도 고귀하기는 마찬가지다.
술을 마시면 고귀하고 이상적인 세상에 금방 다가갈 수 있는 것인가? 청자 중에는 술병과 술잔이 많다. 넓은 잔받침을 가진 연꽃 봉우리 모양의 술잔은 술잔 중에서도 최고로 꼽는다. 연꽃 모양의 술잔은 연꽃이 막 피어 벌어지는 봉오리 모양이다.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것이 진부하다. 황홀하다고 표현해도 모자랄 것 같다.
부처님께 올리는 술잔이었을까. 고려 귀족들이 마시고 스스로 부처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자부했을까. 술잔은 잔에 담기는 술의 성향까지도 결정해 버리고 있다. 저 연꽃 술잔으로 술 마셔보지 못한 사람 이상을 논하지 말라. 술병으로는 매병 모양이 많다. 어깨가 넓고 주둥이가 작으며 키가 훤칠한 고려의 매병은 잔으로도 쓸 수 있는 뚜껑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화꽃을 꽂는 꽃병이 아니라 술병이었다. 모양이 벌써 아슬아슬하다. 밑으로 쭉 뻗어 내리는 곡선이 가냘프다. 저런 술병에 더 큰 의미를 알리기 위해 음각이나 양각으로 연꽃 등의 무늬를 새겨 넣어 화려해지기도 했다.
이런 술을 마셔대면서 고귀한 세상을 들락거릴 수 있었던 귀족들이 세속적인 생활에 찌들어 아옹다옹 살아가는 민중들을 천하게 여기면서 지배하고 부려먹을 수 있음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향로 중에서 최고의 향로는 아마도 몸체는 국화꽃잎으로 덮고 뚜껑은 공처럼 둥근데 구멍이 숭숭 뚫린 투각 향로일 것이다. 몸체는 국화잎과 연꽃이 감싸고 있다. 몸체를 앙증맞은 세 마리 토끼가 흔쾌히 떠받치고 있다. 뚜껑의 숭숭 뚫린 구멍으로 향이 솔솔 피어올랐을 것이다. 그 향기는 연꽃과 국화의 향기가 저절로 배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진리는 저렇게 고귀해야 하는가? 고려 귀족들의 진리 즉 법에 대한 태도는 저렇게 향로를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이제 고려 왕실과 귀족들은 평상시의 삶 자체를 이상적인 세상과 동일시해버리고 싶었나 보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때의 왕이었던 의종 때 청자로 기와를 만들어 지붕을 이었다고 한다. 옥으로 여긴 청자로 기와를 해 덮은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현실과 이상이 혼동되지 않았을까?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고 스스로 여겼을 것이다. 그들의 현실도피는 결국 무인 정변으로 이어졌고, 그들은 영원히 현실로부터 격리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릇의 모양만 가지고는 어딘가 덜 구체적이었다. 그림을 그려 무늬를 만들 수 있다면 훨씬 더 자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수청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노력이 기울여졌고, 마침내 상감법이 개발되었다. 12세기 중엽부터 상감청자가 등장하더니 이내 상감청자 시대로 접어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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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문화 그리고 여행
글쓴이 : 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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