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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에게 분청사기가 있어 자랑스럽다

푸른집이야기 2014. 5. 19. 10:01

청자도 아닌 것이 백자도 아닌 것이 어찌 보면 조잡하고, 어찌 보면 멋있는 우리나라 자기가 있다. 바로 분청사기다. 서울 어느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이 분청사기 항아리를 보자. 자기 몸체의 색은 별로다. 그래서 흰색 분을 귀얄(풀칠이나 옻칠하는 데 쓰는 솔)로 쓱쓱 발랐다. 그 위에 검은 색을 내는 산화철 안료로 역시 쓱싹 단번에 무늬를 그려 넣었다.

▲ 분청사기철화당초문항아리. 실용적인 둥근 항아리 모습과 밑부분을 빼고 칠한 흰색 부분과 아무렇게나 쓱싹 단번에 그려넣은 문양이 기묘하게 어울린다.
ⓒ 도자기화첩
무슨 풀 같기도 하고, 나리 같은 꽃 같기도 하고 뭔지는 모르겠다. 저런 풀을 당초라고 한다. 항아리 아래 부분은 칠하다가 만 것 같다. 이름을 붙여 보자. '분청사기철화당나라풀무늬가있는항아리'쯤 하면 되겠다.

그러나 다시 한번 보자. 조선 전기에 만들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현대 감각이 묻어난다. 항아리 모양과 아래 부분 하다 만 듯한 칠과 문양이 기묘하게 어울리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뭐 저런 아무렇게나 만든 자기가 있나 하지만, 보면 볼수록 분청사기 세상에 빠져든다.

▲ 분청사기상감매병들. 모양 자체가 고려 청자의 유려한 분위기를 지닌 매병과 다르다. 무늬는 소박하고 풀잎과 물고기와 학이 아무렇게나 자리잡고 있다.
ⓒ 도자기화첩
분청사기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주로 상감법을 썼다. 흰색 상감을 많이 한 청자니 상감청자라 불러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상감청자가 추구한 고귀한 세상과는 제법 거리가 멀다.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엔 너무 큰 차이가 있다.

▲ 분청사기상감풀무늬편병. 아래 위로 테두리를 만들고 중앙에 나풀거리는 풀잎 무늬를 상감기법으로 새겨넣었다. 실용적이만 높은 품격이 스며있다.
ⓒ 도자기화첩
고려의 귀족 성향을 벗어나더니 곧 그들 자신의 모양을 창출해냈다. 실용적인 납작한 편병이 되었다. 상감청자에서는 결코 나타날 수 없는 모양이다. 무늬 역시 수수하다. 병 아래 위 그리고 옆면에 단순한 무늬로 중앙에 문양대를 만들었다.

중앙에 연꽃을 새겨 넣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우연히 새겨 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이름을 붙여보자. 한자말을 그대로 쓰면 '분청사기상감연화문편병', 풀어서 쓰면 '분청사기 상감 연꽃 무늬 납작병'쯤 되겠다. 이런 분청사기를 상감분청이라고 한다.

상감법은 매우 어렵고 복잡한 공정을 거친다. 똑같은 무늬를 반복해서 넣을 경우가 생겼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맞아, 그거야" 연꽃이나 국화꽃 같은 무늬를 도장으로 만든다. 그것을 그릇 표면에 찍는다. 자국 난 곳을 칼로 파내고 흰색 흙으로 분장하여 굽는다. 도장을 사용하여 상감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이런 분청사기를 인화분청이라고 한다.

▲ 분청사기 인화문 사발과 대접. 같은 문양을 많이 새겨야 할 경우에는 도장을 사용했다. 그러나 정교함과는 거리가 멀다. 귀한 자기였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유출하지 않도록 관청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 도자기화첩
그런데 인화법 역시 소박하기는 마찬가지다. 꼼꼼한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 보인다. 맞춘다고는 하나 삐뚤빼뚤한 줄이 많다. 하다 만듯한 인화도 보인다. 그러나 정교하지 않은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더욱 털털한 멋을 낸다.

소박하다 못해 천진난만하기까지 하다. 욕심 같은 것은 아예 버린 듯한 분위기다. 만들려고 애쓰고 노력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우연히 만들어져 버린 듯한 기물들이다.

분청사기는 백토분으로 치장한 청자를 말한다. 고려 귀족들은 고상한 청자를 통해서 극락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청자를 갖지 못해 극락을 갈 수 없다고 생각한 민중들을 땅도 주지 않고 부려먹었다. 고려 말에 권문세족들이 원나라를 등에 업고 국가의 재산을 다 차지했다. 모순은 누적되었고, 불만은 극에 달했다.

자주성을 회복하고 부패한 집권 권문세족을 개혁하려는 세력이 점차 나타났다. 향촌에서 인기를 얻던 중소지주층 사대부들이 그들이었다. 사대부와 무인들이 결탁하여 고려왕조 권문세족을 물리쳤다.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 분청사기조화군어문장군. 너무나 소박한 모양에 단순한 무늬들을 새겼다. 좌우에 테를 두르고 중앙에 물고기 두 마리 아래 위로 향하고 있다. 그냥 편안하다. 그래서 걸작이다.
ⓒ 도자기화첩
사대부들은 유교를 내세웠고, 귀족 경향을 철저히 극복하려 했다. 청자가 나타내는 지고의 고상함은 철저히 배격했다. 비현실적 이상보다는 현실과 실용을 중시했다. 고려 청자는 바탕을 상실했고, 대신 실용적이고 천진스런 분위기를 띤 새로운 자기 세상이 열렸으니 그것이 분청사기인 것이다.

조선 시대에 분청사기를 그냥 백자라 불렀다. 분청사기와 함께 조선전기부터 백자를 제작했다.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취향과 어울리는 흰색을 선호했나보다. 분청사기도 점차 백색을 더 많이 띠어갔다.

청자에 아예 흰색을 귀얄로 전체에 바르고 일부를 선이나 면으로 깎아내어 무늬로 삼았다. 깎아낸 분청을 박지분청이라 한다. 이 중에서 주로 선으로 무늬를 표현한 것을 조화분청이라고 한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모양에 천진난만 혹은 장난기가 덕지덕지 묻어나온다. 좁은 측면은 모란 연꽃 따위로 무늬를 새겼다. 중앙 넓은 곳에는 붕어인 듯한 물고기 두 마리를 아래 위로 새겨 넣었다.

▲ 분청사기조화군어문편병. 납작한 병에 물고기 두 마리 나란히 새겨있다. 위 아래 서로 같은 방향으로 무언가 끊임없는 수다를 떨고 있다. 모양과 무늬가 너무나 푸근하다.
ⓒ 도자기화첩
왜 물고기를 넣었을까? 잘 모른다. 그냥 그렇게 새겨왔기 때문일 것이다. 정교함이란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다. 아래 부분 굽에는 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반쯤 추상화된 풀꽃과 단번에 새겨 넣어 버린 듯한 물고기 모양이 저절로 어울리고 있다. 만든 사람은 아예 조화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듯하다.

만들려고 작정하고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다. 어쩌다 만들어져 버린 것 같다. 사대부들이 이런 무의자연을 은근히 좋아했나 보다. 도공들 역시 정교하고 화려하고 예쁘게 잘 만든다고 해서 좋은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었나 보다.

조선전기 수공업은 관영체제였다. 도공들은 공장 안에 이름이 올라 국가에 봄 여름 가을 중 한 철을 징역 당했다. 도공들이 자기를 잘 만든다고 해서 빨리 집에 보내주는 것도 아니었다. 대접이 크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작업 할당량을 일정 기간 동안 아무 생각없이 해내야 했다.

▲ 분청사기박지모란파초문늬편병들. 애초 설계와 의도같은 것은 없었다. 막걸리라도 한잔 했을까? 단번에 새겨버렸고, 일부는 다 긁어내지도 못했다. 만든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자기였다.
ⓒ 도자기화첩
자기 300개에 무늬를 새겨 넣어야 하는 도공도 있었다 치자. 그릇 모양과 이미 칠한 흰색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무늬를 칼로 새기기 시작한다. 어떤 때는 물고기가 들어가기도 하고 어떤 그릇에는 아래 위로 줄을 죽죽 치고는 연꽃을 새겨보기도 한다.

"에이, 연꽃을 많이 하니 지루하구만, 이제부터는 국화다."

어떤 때는 막걸리도 한 잔 했나보다. 파초를 새기고 학을 새긴다. 술 취한 모습이 파초에 나타나고, 학은 무슨 공룡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조잡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가? 흙장난하다 꾸중 들으면서 자랐다. 점차 물레를 돌리고 가마에 불넣기를 익히고 무늬 새겨 넣은 법을 익혔다. 성장과정 자체가 바로 도공의 길이었다. 그러다가 나이 들어 징역 당했다. 자신 앞에 놓인 일감을 거침없이 치러낸다. 잘 만든다고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집에 빨리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도예의 경지는 무르익었다. 자기장의 자존심과 예술 정신은 그럼에도 살아 있었다.

손에 익을 대로 익은 솜씨다.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분청자와 무늬들은 수 백 년을 이어온 도예의 결정체가 되어갔다.

'도자기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최고 경지에 이른 도예를 조선전기 도공들을 통해서 모두 다 표현하고 말았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경지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 말은 영국의 어느 도예가가 한 말이란다.

▲ 분청사기 철화문 대접과 장군. 열 손가락을 너무 자연스럽게 그리고 말았다. 연꽃핀 연못 속의 물고기와 그 위를 날아다니는 새가 마치 친구같다. 무의 자연이란 이런 경지인가?
ⓒ 도자기화첩
흰색 비율이 점점 높아졌다. 귀얄로 전면에 흰색을 칠하고 그 위에 산화철로 그려 넣었다. 칼로 새기기보다 훨씬 자유로운 그림이 나타났다. 아무 생각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발을 보고 귀얄문을 또 보고 그려 넣기 시작했다. 무슨 풀을 그리고 싶었나 보다. 하나, 둘, 셋... 손가락은 열, 열 개의 선으로 얼렁뚱땅 새겨 넣었다.

만들려고 애써서 나타날 수 없는 경지가 또 하나 탄생했다. 욕심이 있을 수 없는 당대 최고의 도공이 자신도 모르게 만들고 만 기물이 되고 말았다. 현대 감각이 막 살아 있다.

▲ 분청사기덤벙문주전자. 누군가 최근에 이런 분청자를 덤벙분청이라고 이름 붙였다. 흰색을 칠하지 않고 백토액에 덤벙 담구어 버렸다. 저 무심함이 가슴에 들어와 안긴다.
ⓒ 도자기화첩
분청사기 말년에는 모든 것이 귀찮아졌나 보다. 무늬보다는 그냥 흰색을 더 좋아하게 되었나? 백토의 용액을 귀얄로 덕지덕지 귀얄 자국이 나게 발랐다. 귀얄분청이라나. 아예 백토의 용액에 덤벙 담가 버렸다. 그래서 덤벙분청이 탄생했다.

분청사기는 상감분청에서 시작하여 점차 흰색의 면적을 넓히더니 마침내 몸 전체를 흰색으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백자에게 자리를 넘기고 사라지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로 백자가 완전히 분청사기를 압도하고 말았다.

분청사기는 그래서 음악으로 치면 시나위 같다. 최고의 고수들이 모였다. 장구가 굿거리 장단을 친다. 서로 잘 아는 악사들이 아무 생각없이, 악보도 없이 연주한다. 가야금이 잘하는 부분이 나타났다. 다른 악기들은 숨을 죽인다. 가야금이 신나게 놀아 제친다. 뒤를 이어 대금이 줄창나게 앞서 나간다. 해금이 야금야금 도와주는 듯하다가 뒤를 잇는다.

장단은 조금씩 빨라진다. 어느새 삼채가 되었다. 삼채 분야에서는 피리가 맘껏 논다. 밑바닥을 훑어주고 있던 아쟁이 그 큰 폭으로 신나게 좌중을 압도한다. 모두 무아의 경지가 되었다. 자진모리에서는 다시 한번 모두 큰 소리로 협연을 해본다.

서로 잘 알기에 모두 아무도 모르게 조화를 이룬다. 점점 빨라지자 장구가 이젠 전체를 막 몰아간다. 절정에 달했나 보다. 장단은 빠른 장단이지만 곡조는 정리해나가고 있다. 대금과 아쟁이 한풀이하듯 절정을 맞는다. 끝났다. 누가 작곡해 본 적도 없는 한번만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악사도 청중도 모두 꿈 속을 헤매다 겨우 깨어났다. 시나위가 자기로 남아 있는 것이 나는 분청사기라 본다.

▲ 분청사기박지문 편병과 항아리. 편병에는 물고기가 드러누워 있고, 항아리 아래에는 종종걸음으로 새 한 마리가 바삐 쫓기고 있다. 왜 그렇게 그렸을까? 잘 모른다가 정답이다.
ⓒ 도자기화첩
분청사기는 조선전기라는 역사 조건이 만든 최고의 자기였다. 너무나 소탈하여 모든 것을 다 포용한다. 너무나 천진난만하고 순진무구하여 아름답다. 보고 또 보면 화려한 것은 금방 싫증을 내지만 천박한 존재조차도 언제나 끼어들 여지를 품은 분청사기는 보고 또 보면 더욱 정감이 샘솟는다. 우리에게 분청사기가 있다는 사실이 나는 너무나 자랑스럽다.

출처 : 문화 그리고 여행
글쓴이 : 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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